본문 컨텐츠

본문콘텐츠

행사

Korean Stone Art Museum

  • Home
  • 행사
  • 언론보도

언론보도

[SR 타임스 20221215] [SR초대석] 천신일 ‘우리 옛돌 박물관’ 이사장 1

작성자 : 우리옛돌박물관 | 작성일 : 22-12-16 10:52 | 조회수 : 7,253

 

c5ba0512a5f647ceb15b4401f25b0877_1671154
▲기업의 문화유산 보존과 사회에 기부, 기증은 나라 사랑의 정신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천신일 이사장.ⓒ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14] 석조 문화재 환수로 애국 실천한 천신일 ‘우리 옛돌 박물관’ 이사장

천신일 이사장은 기업인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한창 기업 활동 하던 시절 세중여행사로 세간에 중견 기업 회장 급으로 알려진 인물 아니었던가? 이런 분이 아무도 크게 관심 없었던 우리 돌 유산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기업 자산을 확대하는 의도에서 석물을 모았지 않았을까? 하는 예측도 해봤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1년에 박물관 운영이 적자임에도 석조 유물에 애착을 가지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큰 궁금증만 생겼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주연경 학예부장께서 야외 관람장(돌의 정원)을 잠시 둘러 보기를 권했다.

 

박물관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성북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5,500평 대지의 우리 옛돌 박물관은 실내 전시관이 약1,000평에 지하1, 지상 3층건물로 1층에 환수유물관, 2층 동자관, 벅수(돌 장승), 자수관, 3층 현대작품 기획 전시관으로 되어 있었다.

 

인터뷰 전 들러본 야외 전시장은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나 칠레 이스터섬의 명물인 모아이(Moai)석상같이 자연스러운 배경 속에 놓여 있진 않았지만, 박물관 내·1,600점 중 석조 유물(문인석, 동자석, 장군석 등)을 산기슭 구역을 나눠 테마 별로 모아 놓았다.

 

잠깐 보았지만 모아 놓은 돌 문화 유산을 통해 조상들의 문화와 예술적 감각 뿐만 아니라, 생활해 온 숨결이 느껴졌다.

- 애국심 하나로, 국가도 하기 힘든 일본으로부터 석조 유물 2차에 걸쳐 환수

 

 

- 버려진 돌 조각 수집하여 예술적, 역사적 가치 있는 문화재 급으로 의미 상향

 

- 흩어져 있는 석조 유물 방대하고 체계적 수집...석조의 미술 문화사적 연구 위한 토대 제공

 

- 큰 적자에도 불구 우리 옛돌 박물관’ 1,600점 석조 유물 전시...조상의 숨결을 국민들도 공감석조 유물 대중화에 기여

 

- 대학교, 박물관, 체육계 등에 금전, 토지, 주식, 문화재를 끊임없이 기부-기증...‘노블리스 오블리제묵묵히 실천

 

 

Q. 박물관에 들어오다 얼핏 환수유물관을 보았습니다. 환수유물관이 이 박물관만의 특징적인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이사장님이 이 박물관을 가꾸는 신념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파악했나요?

 

== 제대로 봤습니다.

 

내가 이 석물 들을 모으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아닌 민간인인 내가 일본으로 유출된 석조 유물 80여점을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바쳐 2차에 걸쳐 환수 받은 유물입니다.

, 지난 40 여년간 우리 석조 유물에 대한 애정과 문화재를 수호 해야 된다는 사명감을 갖게 하는 심정적 바탕을 보여주는 전시관이기도 합니다.

이 생각이 항상 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국·내외 산재해 있는 석조 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해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그 말씀은 처음부터 전통문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조상들의 고유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인가요?

 

==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나는 1974년도 제철화학을 설립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경제도 막 도약기를 앞둔 태동기 아닙니까?

당시에 나도 사업을 시작한 젊은 청년 사업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외국의 바이어들도 많이 만나는 시기였습니다.

내가 세운 회사 이름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근대 산업화를 주도한 포항 제철과 관련 있는 협력 회사였기 때문에, 바이어 접대가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바이어 한테 훌륭한 대접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나 문화를 경험해 주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나는 인사동 골동품 점을 자주 드나 들게 되면서 도자기와 고서화 등에도 자연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c5ba0512a5f647ceb15b4401f25b0877_1671154
▲일본에서 환수한 석조 유물을 ‘우리옛돌박물관’에 전시 배치하며 기념식을 가졌다. ⓒSR타임스

Q. 그럼 일찍 부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고, 일반인들에 비해 유물을 보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 노력도 하신 것이네요?

 

 

== 단지 사업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골동품을 식별해 보면서 풀어보는 즐거움도 가졌었지만, 당시 포항 제철 박태준 회장께서 나의 관심과 안목을 크게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박 회장께서 포항 제철 영빈관에 필요한 그림과 도자기 등의 작품을 구입해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그래서 도자기 전문가를 모시고 인사동과 여기 저기 답사 하면서, 수운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들과 신라 토기를 몇 점 구입해서 

영빈관에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량한 영빈관과 주변 배경에 조화가 되게 그림과 도자기를 구입해서 배치하였기 때문에 박 회장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꽤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미술과 도자기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사동 골동품 점도 더 빈번하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Q. 조상들의 문화유산에 일찍 부터 관심도 있었는데, 더 동기부여를 한 계기도 있었군요. 당시에는 고서화나 도자기 같은 종류가 문화재로 세간에 관심이 있었을 텐데요상대적으로 석물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 그렇죠. 당시에는 아무렇게 지나 치는 게 돌 이었죠. 또 국민들도 돌을 석물로 활용해서 일상적으로 생활에서 사용되는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묘지를 만들 때 비석 같은 것을 국민 누구나 만들어 사용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을 유물로 귀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크지 않았던 시기죠그런 시절이지만 나한테는 생각을 바꿔야 할 계기가 발생했습니다.

1978년 쯤 입니다. 평소 내가 잘 다니던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일본인과 골동품 가게 주인이 우리나라 석조 유물 사진이 들어 있는 앨범을 펼쳐 놓고 가격 흥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내가 대뜸 골동품상한테 욕을 하면서, 왜 일본 사람한테 파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그 분이 장사하는 사람은 돈 많이 주는 사람한테 물건 파는 게 마땅한 상술이라면서, 나한테 27점 석조 유물을 1억 5천만원에 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좋은 아파트 한 채 값이 기껏 1천만~2 만원 하는 시대입니다. 아파트 열 채가 넘는 가격으로 힘들게 구입해서 집 마당에 세워 놓게 되었습니다엉겁결에 가치는 잘 몰랐지만 많은 돈을 투자해서 일본인들한테 넘어가는 석조 유물을 회수했다는 생각으로 뿌듯한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Q. 그 때에 그 석조 유물을 흥정하던 분이 일본인이 아니라면 무리를 해 가면서 구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었겠죠.

 

왜냐하면, 나는 광복 전에 태어났지만 직접 일제 강점기 고초를 겪었다 할 수는 없는 세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는 일본의 압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감이 대단한 시대를 겪어 나왔습니다어릴 때부터 유관순 누나가 일제에 고문 당하는 무성 영화를 보고 분노도 하였습니다. 또 대학 시절에는 한일 협정을 반대하는 6.3 동지회 활동도 주도하기까지 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석조 유물을 사서 반출한다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즉각 반발할 수 밖에 없었겠죠.

이 사건을 계기로 나 자신 석조 유물에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Q. 그러한 일을 겪고 국·내외 산재해 있는 우리 석조 유물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는 계기도 되었겠군요. 우리나라에 있는 석조 유물 수집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거의 일본이겠지만 외국으로 반출된 석조 유물의 환수는 더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 일일이 밝히기에는 너무나 사연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의 유물을 내 손으로 다시 모아본다는 신념으로 일본으로부터 1, 2차에 걸쳐 환수를 받아 지금 우리 옛돌 박물관에 소장 하게 되었습니다1차적으로 2000, 나고야 미에현에 사는 쿠사카 마모루라는 수집가에게 지금 우리 옛돌 박물관’ 1층 환수유물관에 전시된  문인석 47점 외 70점을 환수해 왔습니다쿠사카는 당시 한국에서 거래 가격의 다섯 배가 넘는 큰 비용 지불을 요구했습니다구입을 작정한 나로서는 요구 가격이 엄청나서 놀랐지만 원래 일본 골동품상의 가격 산정으로는 한국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다섯 배는 타당한 가격이었습니다일본으로 직접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해 보았지만 쿠사카수집가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쿠사카를 어렵게 한국으로 초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장고로 사용하는 용인의 세중옛돌박물관을 보여주며 석조 유물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도 재인식 시켜 주었습니다뿐만 아니라 한국을 같이 여행하며 우리 전통 문화에서 석조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도 알려주기까지 하였습니다개인적으로는 중풍 지병이 있는 그를 서울의 유명한 한의원에서 치료하고 한약 선물까지 했습니다. , 아내는 아내대로 김치를 좋아하는 이들 부부에게 직접 담근 김치를 일본으로 보내는 정성도 보였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쿠사카마모루수집가로부터 석조 유물 70점 중 16점은 값을 치르고 매입했고, 54점은 기증을 받아 용인의 세중옛돌박물관을 거쳐 현재 우리옛돌박물관에 소장 할 수 있었습니다.

 

 

c5ba0512a5f647ceb15b4401f25b0877_1671154
▲포항 공대에 6만3천평 학교부 지와 많은 금원 기부에, 포항 공대 교정에 표지석을 세웠다. ⓒSR타임스

 

 
Q. 환수 석물 유물이 70점이나 되기 때문에 반환해 오는데도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 일본에 유출된 우리나라 석조 유물 문화재를 한 개인의 노력으로 반환 받게 되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반환 받을 때 언론사 문화 담당 논설 위원 몇 십분, 박물관장님 몇 십분이 참가했고, 일본에서는 나까소네 전 총리 등이 참석했습니다.

, 그 당시 살풀이 춤으로 유명한 서울대 이애주 교수팀이 살풀이 춤까지 하면서, 행사를 NHK에서 위성중계도 했습니다.

이런 감격도 한 순간이고요, 석조 유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것도 아주 어려웠습니다. 기중기까지 동원해 한 점씩 나무박스를 만들어 컨테이너에 넣어야 했습니다석조 유물은 특히 목 부분이 취약해서 석물의 목이 부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목 부분에 스폰지를 대고 이중, 삼중으로 감싼 다음 다시 전체를 안전하게 포장해 나무상자에 넣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천신만고 끝에, 40피트짜리 큰 컨테이너 3대에 가득 넣어서 나고야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 통관을 거쳐서 용인에 세중박물관으로 오는 길고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Q. 20001차 석물 유물을 환수한 후로는 그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환수 유물이 없었나요?

 

==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외 석물 문화재 환수에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9오자와 테리유키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초기 장군석과 장명등, 비석받침, 수병 등 8점을 환수하였습니다.

원래 오자와 테리유키씨 외조부(요시이에 게이조)가 경매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돌려 줄 여러 박물관을 사전에 물색했답니다.

그 결과 우리 옛돌 박물관이 석물 유물 수집·보관의 정통성이 뛰어나다는 판단으로 접촉을 하게 되어 환수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밝혀 둘 것은 이러한 문화재적 석물 유물을 개인이 환수 받는 것이 형식은 기증이지만 내막적으로는

금전적 보상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국가 단위로는 문화재 반환이 외교적 선린관계 명분에서 이뤄지지만, 개인 박물관 반환은 반환 받고자 하는 개인의 신념과 국가를 위한 애국적 가치관뿐만 아니라 금전적 희생이 있어야 결실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